[뉴스통] 1987년 6월 민주주의의 꽃, 그리고 기억해야 할 이름 / YTN

2017-11-15 0

촛불 혁명.

지난해 '국정농단' 사태에 분노한 국민들은 하나가 돼 광장에 나와 촛불을 들었고, 결국 '정권 교체'라는 결실을 맺었습니다.

시민들이 힘을 모으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줬습니다.

30년 전, 유독 뜨거웠던 그 여름처럼 말입니다.

1987년 6월 10일.

호헌철폐, 독재타도라는 함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학생들은 물론이고 이른바 넥타이 부대로 불린 직장인들까지 쏟아져 나온 거리는 최루탄 연기로 뿌옇게 물들었습니다.

택시기사들은 경적을 울리며 시위에 동참했습니다.

대한민국 민주화 운동의 분수령이 된 6월 민주항쟁을, 당시 주역이었던 이인영 민주당 의원은 이렇게 기억합니다.

[이인영 / 민주당 의원, 당시 고려대 총학생회장 : 6월 항쟁은 1987년 판 촛불 혁명이었다…. 민주주의와 국민 주권, 이런 측면에서 본질은 하나라고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6월 항쟁은 보다 집단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의 결과인데요.]

6월 민주화 항쟁의 불씨가 된 두 사건이 있습니다.

당시 경찰이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해명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입니다.

민주주의를 꿈꾸던 스물 한 살의 청년 박종철.

1987년 1월 민주화 운동을 하다 경찰에 연행돼,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끌려가 조사받던 도중 사망합니다.

당시 경찰은 사건을 은폐하고 축소하는 데에 급급했고 국민은 분노했습니다.

그리고, 1987년 6월 9일.

경찰이 쏜 최루탄에 쓰러지는 또 한 명의 청년 이한열. 당시 연세대 경영학과 2학년생이던 이한열 군은 경찰이 쏜 최루탄을 맞은 후 쓰러졌습니다.

당시 쓰러진 이 군을 같은 학교 학생이 부축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학교 앞 시위에 참가한 이한열 군이 경찰 최루탄에 맞아 중태에 빠진 사실이 알려지자 시민들의 분노는 극에 달합니다.

이 사건으로 6월 항쟁의 열기는 더욱 뜨거워졌습니다.

최루탄에 맞고 한 달 뒤 결국 사망한 이한열 열사.

이 열사의 어머니는 아들이 바라던 대한민국은 이제 시작됐다고 언급하면서, 많은 이들이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고 말했습니다.

[배은심 / 故 이한열 열사 어머니 : 많은 사람들이 6.10 항쟁이 미완이라고들 많이 하셨습니다. 이제 30년이 됐으니까 좀 완성이 되지 않겠는가, 저는 그런 걸 바라고 있습니다.많은 사람들이 이한열이라는 이름을 기억해줬...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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